
세상은 워낙 천태만상이고 각양각색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쌍둥이라해도 철두철미하게 똑같지가 않다. 황차 겉모습이 그럴진대 가려진 내심의 세계는 더더욱 더듬을 수 없이 천양지차다. 그 또한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각자 내재한 저마다의 속성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존중함이 없이 왕왕 자신만의 서투른 자대로 급급히 판단하고 단정지으며 선입견으로 판결하는 “법관”으로 거듭날 때가 참 많다.
일전 나는 뜻밖에 심천의 모 무역회사에서 날아온 파일 한 통을 접했다.
“안녕하십니까? 너무 오랜만입니다. 절 기억하고 계시지요? 20여년 전 공부를 잘 하지 않고 말썽만 부려 퇴학 당했던 황×× 입니다”
황××라? 그렇지, 분명 공부는 안하고 사회의 어중이떠중이들과 친구로 사귀며 술담배에만 골몰하던 그 말썽꾸러기였다.
미꾸라지 한마리 개울물 다 흐린다고 그때 그 학생때문에 내가 맡은 학급은 번번이 우수학급으로 되지 못하였고 그래서 늘 머리 아팠다. 결국 나는 학교지도부측에 퇴학을 제의하여 학생본인은 물론 부모들까지 찾아와 사정했지만 그 학생은 끝내 교문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래선지 그후 나는 그 학생을 한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이 오늘날 어엿한 무역회사의 대표로 탈바꿈되여 문안을 전해 온 것이다.
퇴학당한 후 전문학교에 들어가 애써 컴퓨터와 외국어 그리고 경영학을 배워서 지금은 이름이 뜨르르 난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며 그때 애써 공부하지 않은 것이 더없이 후회된다고 했다.
메일을 읽고나니 2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자책감에 가슴이 쓰려나며 생각하면 괘씸스러울텐데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문안편지를 띄워온 그가 너무 고맙게 안겨왔다. 더불어 언젠가 읽었던 이솝의 우화가 생각났다.
아침부터 숲속을 돌아다니던 사슴이 맑은 물을 발견하고 속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그러고나서 물을 들여다보다가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사슴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모습이 여간 아름답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머리에 난 뿔은 짐승의 왕인 사자에게도 없는 것이였다. 그러나 가늘고 길기만한 자신의 다리모습을 보는 순간 사슴은 몹시 언짢았다. 바로 그 보기 흉한 다리때문에 멋진 뿔자랑도 못하겠다는 생각이였다. 그때 홀연 사자 한마리가 나타나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슴은 뛰는데는 사자보다 나아 점점 사자를 멀리 뒤떨궈놓았다. 그런데 우거진 나무숲으로 뛰어들어간 사슴은 그만 뿔이 나무가지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사자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뿔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리를 못 생겼다고 원망하던 사슴은 바로 그 못난 다리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후에는 그 아름다운 뿔때문에 결국 죽게 되였다.
학교에서의 교육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런 것이 아닐가? 이 사람은 이래서 부족하고 저 사람은 저래서 희망없다고 단정하며 사귈 가치가 없는 상대로 함부로 막 치부할 수 있을가?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 우주에 생겨나는 시각부터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잘났던 못났던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난 인간의 모습은 더더욱 그렇다. 온통 결점만을, 혹은 전부 장점만을 지니고 태여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미흡한 점과 우점을 두루 갖춘 실존의 모습이 어쩌면 정상적인 인격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할 때 눈에 보이는 작은 결점 혹은 부실한 점으로 전부를 부정하며 때이르게 속단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말썽꾸러기학생이 교원을 기쁘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말썽거리의 외부적 표현 뒤에는 흔히 훌륭한 품성과 아주 큰 잠재력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 토질이 나쁜데다 자갈까지 섞인 땅뙈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거기엔 거대량의 보물이 매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때론 분명한 약점도 알게 모르게 생의 디딤돌로도 될 수 있다는 것. 명기해야 할 삶의 지침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살짝 깨여져 금이 간 항아리, 못 생긴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그 항아리를 물 긷는데 사용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주인은 금이 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물 항아리처럼 아끼며 사용했다.
“나로 인해 그토록 힘들게 길어온 물이 조금씩 새 버리는데도 주인님은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다니…” 깨진 항아리는 주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였다. 어느 날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지 않으세요? 전 별로 쓸모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물이 담긴 항아리를 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어느 길에 이르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늘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가에는 꽃들이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항아리가 물었다.
“어떻게 이 메마른 산길에 예쁜 꽃들이 피였을가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로 네 몸의 깨진 틈으로 새여 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세상은 참으로 신비로우며 생의 법칙은 그야말로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오묘하다. 얼키고 설킨 그물과도 같은 것,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 없다.
무질서도 질서요, 무미함도 맛이며 무색도 색이듯이 무가치한 것도 유가치일 것이며 때로는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유에서 무로 회귀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진대 편견과 선입견으로 재단하다보면 결국 형평성을 잃은 기울러진 삶의 운동장을 마주하게 될뿐이다.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피여 있는 꽃은 없다. 마지못해 피여 있는 꽃도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태여난 인생 없듯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도 없다.
한사람 한사람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삶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다단한 모순 투성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울울창창한 여름날의 푸른 숲도 나무의 모습이지만 그리움과 기다림을 안고 홀로 속살을 키우며 인내하는 겨울날의 헐벗은 모습도 분명히 나무의 모습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또는 놓인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런만큼 우리의 사고방식도 객관적이여야 한다.
꽃 중의 꽃으로 불리우는 장미를 볼진대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장미에 하필 가시가 있다고 평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런 가시덩굴 속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가 피여났다고 감탄할 수도 있다.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각도 또는 그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협애하고 고루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기시하고 배척하고 갈등하기 보다는 밝은 생각,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고 포섭하고 관용하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결 아늑하고 부드러워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오늘의 웃는 내 모습이 어느 날 누군가의 아픔에 질렸던 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녕 사랑하는 사람의 허점과 아픔마저도 껴안으며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보듬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평화롭고 따뜻함이 넘치지 않을가?
모자라는 남자와 모자라는 녀자가 만나 완벽한 사랑 살찌워가듯 세상에 워낙 절대적으로 좋은 것, 혹은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미인송은 멋진 모습으로 산의 풍경을 돋보이게 하고 못난 나무는 우직하게 산을 지킨다.
배려하고 인정하고 포용하며 따뜻이 두 손을 맞잡을 때 우리가 머무는 공존의 울타리는 찬연한 해빛으로 눈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