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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스하키 국가팀을 전성기로 이끈 조선족 리만기 감독

2022-02-11 14:55:59

2월 10일 저녁 9시 10분에 시작한 북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冰球) 조별리그 중국과 미국의 대결 생방송. 할빈시의 한 아파트에서 어떤 백발로인이 텔레비전 앞에서 경기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로인의 두눈에는 온통 사오십년전 경기장밖에서 젊은이들의 대결을 지켜보던 자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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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기, 남, 88세, 조선족, 전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감독. 략력을 보면 그가 왜 잠자리에 들지 않고 텔레비전을 지키고 있었는지 리유를 알만하다. 

"어제는 스위스가 러시아에게 0-1로 졌는데 옛 제자가 위챗으로 문자 와서 스위스를 두고 둘이서 회억을 좀 해봤다"고 그는 말했다. 1980년대 세계아이스하키 선수권대회 참여당시 대결상대중에 스위스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감독이 바로 리만기선생이였다. 1981년 북경에서 세계아이스하키 C조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7개 나라가 참가한 이 대회에서 중국팀은 6승 1패 2위의 성적으로 B조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82년에는 세계순위가 15위까지 올라가면서 력사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는 중국 아이스하키의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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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러시아와 스위스팀의 아이스하키경기를 시청하고있다.

리만기선생은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대표팀 감독을 맡아왔다. 중국이 선수권대회에 참가한것도 1972년부터다. 1981년 당시 대표팀 20명 선수중 할빈팀 출신이 9명이나 됐는데 할빈시는 전국대회에서 여러차례 우승을 따내는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실력을 자랑했다. 리만기도 50년대 중반부터 할빈팀에서 선수로 지내다가 60년대부터 감독까지 겸하면서 팀의 전성기를 이끌다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였던 것이다. 수화시 출신인 리만기선생은 본래 빙속을 하다가 고중때 아이스하키로 방향을 바꿨다. 1956년 그는 할빈아이스하키팀의 일원이 되였으며 할빈팀은 7차례 전국 우승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유럽국가에도 친선경기를 수없이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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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세계선수권대회참가 당시 집체사진. 웃줄 왼쪽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리만기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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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세계선수권대회참가 당시 집체사진. 맨 아래 왼쪽 첫 사람이 리만기 감독이다. 우로부터 두번째줄 왼쪽 두번째 사람이 최정문선수.

C조 선수권대회는 급별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회였다. A, B조는 강팀조였다. 전에는 북경에서 류사한 국제대회를 적게 개최했던 원인으로 이번 대회는 널리 주목받았다. 당시 수도체육관도 건설한지 몇년 안됐을 때였는데 공석이 없을 정도로 관중들로 꽉 찼다. 

관중들은 '단결분투 진흥중화(团结拼搏 振兴中华)' 표어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대표팀을 응원했다. 리만기선생의 회억에 따르면 이같은 표어가 처음 나온 시간이 바로 이때였다. "이런 표어를 처음 보고 크게 고무를 받고 더 열심히 싸웠다"고 그는 말했다. 

가장 어려웠던 경기는 오스트리아(奥地利)와의 대결이였다. 1972년 중국팀이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후부터 그들과 여러차례 겨뤘는데 이긴적이 없었다. 상대팀은 개인기가 훌륭해 공을 쟁탈하기가 어려웠다. 줄곧 피동에 처했지만 중국선수들은 몸까지 던져 슈팅을 막아내는 놀라운 투지를 보여줬다. 압력이 가장 큰 선수는 수문장 최정문(조선족)이였다. 리만기 감독이 흑룡강성체육학교에서 발견하고 국가대표로 등용한 최정문은 상대의 비발같은 슈팅을 수도 없이 넘어지며 막아내고 또 막아냈다. 또 한 선수는 상대선수와 충돌하면서 잠간 기절했지만 잠시후에 아픔을 참아가면서 다시 경기장에 나갔다. 리만기 감독은 끊임없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전술을 배치하면서 대표팀의 투혼을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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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흑룡강성대표팀.

또 "한경기가 끝날때마다 국가를 연주했는데 6승을 거뒀으니 국가가 여섯번 울려퍼졌다. 매번마다 우리는 큰 감동을 받고 용기를 더욱 살렸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후 인민일보가 '중국아이스하키팀의 전력분투정신(拼搏精神)'이라는 론평을 게재했는데 이는 중국아이스하키팀에 대한 가장 큰 표창이였다. '전력분투정신'이란 단어도 이때 처음 나왔다. 그후부터 중국체육건아들이 정상을 향해 달리는 정신적 힘이 됐다. 

그후에도 중국대표팀은 1986년, 1990년 아시아동계운동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리만기 감독은 1983년도 중국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 할빈시체육운동위원회 부주임으로 행정업무를 맡았다. 현재 체육국의 전신으로 부주임은 현재의 부국장급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도 국가체육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국가청소년팀을 이끌고 일본, 한국, 호주 등 나라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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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국가대표팀 독일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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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후 리만기 감독은 부인과 함께 할빈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아이스하키의 경우 이번엔 주최국에 참가자격을 주는 혜택이 주어졌다. 전에는 반드시 경기를 거쳐 명액을 따야 했다. 이번 기회에 선수들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한 나라가 경제실력이 없이는 이런 대회를 개최하기 어렵다. 이뿐 아니라 빙상운동성적도 비슷하게 따라가야 된다. 결국 종합적으로 나라를 선전하는거다. 3억명을 빙상운동에 참가도록 이끌자는 습근평주석의 목표제기는 국민의 체질증가를 위해 매우 필요하다. 전민이 체육에 참여하다보면 나라의 체육수준도 올라간다. 동계올림픽대회의 개최는 대중체육의 발전을 이끄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것이다"며 올림픽대회 주최의 의미를 새겼다.


리만기 략력

1955년 할빈시제4중학교 졸업.

1955년~1979년 할빈시아이스하키팀 선수겸 감독. 전국아이스하키갑급리그 참가. 전국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 전국동계운동회에서 여러차례 우승. 

1972년~1986년 중국아이스하키국가대표팀 감독 등 직무를 맡고 세계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 여러차례 참가.

1973년~1979년 할빈시체육공작대 부대장.

1978년 중국체육운동개척자 칭호 획득.

1980년~1996년 중국아이스하키협회 부주석. 중국아이스하키감독위원회 주임.

1983년~1996년 할빈시체육운동위원회 부주임. 할빈시체육총회 상무부주석.

1949년~1989년 건국이래 흑룡강성우수감독으로 선정.

2004년 할빈시체육공작대 첫 창업자칭호 획득.

2019년 중국아이스하키사업걸출공헌상.

/특별취재팀 라춘봉 마국광 리수봉 윤선미 리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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