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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 >

경박호명승지와 더불어 발전해온 폭포촌을 아십니까

2021-12-12 15:02:13

폭포촌은 녕안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70km, 발해진에서 약 25km 떨어져 있는데 중국의 유명한 명승지인 경박호 북쪽의 가장자리에 '지하산림'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있는 살기좋은 아담한 조선족마을이다. 비록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석강벌에 일떠세운 마을이지만 경박호수역과 삼림의 영향으로 공기가 특별히 맑고 청신하여 그야말로 풍수가 좋은 삶의 보금자리이다.

폭포촌은 녕안시 조선족마을치고는 가장 나이가 젊은 마을이다. 1965년에 녕안시정부에서는 오랜 세월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십리석강'을 개발하려고 한전농사를 짓고있는 조선족농민들을 석강개발에 동원하였다. 당시 석강개발에 나선 농호가 300여세대에 달하였는데 모두가 석강판에 벼농사를 지어 이밥을 배불리 먹어보자는 소박한 희망을 품은 개척민들이였다.

1966년에 100여명이 되는 청장년들이 석강개발선두대로 호북에 집결되였다. 그들은 남포로 돌을 깨고 목도로 돌을 메여 나르면서 근 1년간 악전고투하여 경박호수의 물을 끓어들이는 너비 6미터, 길이 300미터나 되는 관개수로를 내였다. 이는 벼농사를 지을수 있는 근본적인 보장으로 된다.

1967년 초봄에 300여세대나 되는 개척민들이 석강벌로 집단 이주를 오게 되였다. 이들은 홍위, 호북, 서구, 오성 등 4개 마을로 나뉘여 한편으로는 살림집을 지었고 한편으로는 황무지개간에 나섰다. 돌과 떼장을 날라 도랑뚝과 논뚝을 만들어 논을 풀었다. 그리고는 논에 물을 대고 벼씨를 뿌렸는데 이렇게 새로 일군 석강판 논에서 벼농사가 시작된것이다. 벼씨를 뿌린 여러지역의 논의 물은 논바닥의 돌틈으로 새여 나가 논에 물이 개피지 않았고 논에 뿌린 벼종자는 새들이 다 쪼아먹었다. 이렇게 련속 두해나 페농이다 보니 아무런 수익도 없는 이런 지역의 개척민들은 국가의 대여곡을 먹는 신세가 되였다. 하여 1969년 초봄에 녕안현 정부에서는 일부 농호들을 원적지로 돌려 보냈고 일부 농호들은 발해진과 성동향의 여러 조선족마을에 이주를 시켰다. 유독 홍위와 서구 마을의 개척민들만 계속하여 석강판에 남았다.

원래 홍위마을은 지금의 폭포마을과 60여리 떨어진 '발해청년농장'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70년말에 경박호협곡에 있는 '강감자(江坎子)'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협곡을 따라 천여메터 되는 곳에 서구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두 마을을 합병하여 홍위대대로 마을이름을 정하고는 강감자에 자리를 잡은 농호들을 제1생산소대로, 서구(西区)에 자리잡은 농호들을 제2생산소대로 하였으며 1984년에 녕안현 정부의 요구에 따라 마을이름을 '폭포촌'으로 개칭하였다. 1990년대초기부터 유람객이 많아지면서 려관과 식당의 경영의 편리를 위하여 많은 촌민들이 '강감자'와 '서구' 중간에 있는 현무암지대에 벽돌기와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이곳이 폭포촌중심마을로 되였다.

마을 합병 당시에 논이 45헥타르와 밭이 85헥타르였는데 수전농사는 제초를 제때에 하지 못하여 밭을 묵여 수확고가 매우 낮았고 한전농사는 가물 때에는 흙층이 얇아서 곡식이 말라죽고 장마때에는 밭이 침수되여 페농이 되고 만다. 갓 일떠세운 마을이여서 집체자금도 형편없었고 농호들의 생활은 가난하기로 린근에 소문난 마을이였지만 폭포촌 사람들은 몇년동안 악전고투하여 40여헥타르나 되는 논을 새로 일구어 흑룡강성에서의 석강판 벼재배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였다. 

실로 눈물겨운 고역을 딛고 희망을 일군것이다. 비록 논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왔지만 소득이 높지 못하여 폭포촌사람들의 생활은 정말 궁핍하였다. 식량난에 허덕이던 폭포촌사람들은 국가의 대여곡이나 반소량(反销粮)을 먹었고 생산대의 년말분배 때에 최고로 한공에 20전이여서 현금을 손에 쥐여 본적이 없는 생활을 하여왔다.

폭포촌은 신비로운 힘과 정신이 깃든 곳이다. 가난에 고개를 숙이지 않은 폭포촌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길을 대담히 개척하여 갔다.

경박호의 조수루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협곡을 따라 흐르는데 락차가 심한 지세를 리용하여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폭포촌사람들은 도전에 나섰다.

촌에서는 당지부서기 로성극을 총지휘로, 한영준을 총공정사로, 문금수를 건설공사장 대장으로 하는 '폭포촌수력발전소건설지휘부'를 내오고 1970년도부터 시공에 착수하였다. 당시 촌의 경제기반이 약하여 시공에 필요한 기계들을 사들일수 없어 오직 촌민들의 두손으로 모든 작업을 하였다. 땜이 홍수에 밀려 무너졌을 때에도 촌민들은 땜을 더욱 견고하게 쌓아가면서 밤에 낮을 이어가면서 1974년 10월 27일에 폭포촌 제1수력발전소를 건설하였다. 당시 발전소에 안장된 50키로와트 발전기 2대가 하루에 100키로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면서 좋은 수익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발전소의 건설로 촌민들은 3년이나 전기를 무료로 사용하는 혜택을 보았고 발전한 전기를 국가적력망에 이어놓아 생산한 전기판로문제를 해결하였다. 폭포촌의 수력발전소는 흑룡강성의 농촌마을에서 사상 처음으로 되는 수력발전소이다.

첫 수력발전소를 건설한 성공의 단맛을 본 폭포촌에서는 1976년에 두번째수력발전소건설에 뛰여들었다. 폭포촌의 제2수력발전소건설도 전체 촌민들의 일심동력과 3년동안의 신근한 로동으로 1978년 8월1일에 준공되였다. 총투자가 70만원이였고 2백키로와트 발전기 3대를 안장하였는데 년평균 발전량은 170만kw 에 달하였고 년수입이 38만원에 이르렀다. 당시 흑룡강성 진뢰성장이 폭포마을로 시찰오셔서 폭포마을에서 건설한 수력발전소를 긍정하시고 높이 치하하시였다. 이때로부터 촌의 집체경제가 한층 튼튼하여졌다. 

개혁개방으로 경박호의 관광업이 활기를 띠면서 폭포촌을 찾아오는 유람객도 많아져서 폭포촌은 유명세를 타게 되였다. 촌에서는 더욱 많은 유람객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경박호 풍경구에 유람삭도가 없는것을 감안하고 유람삭도를 가설하기로 하였다. 1990년에 문관식지부서기와 현대복촌장은 북경, 진황도, 대련 등 풍겨구에서의 유람삭도 현지 고찰을 마치고 마을에서 여러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득과 실을 따져 1991년 2월에 폭포촌과 대련선박설계연구소와의 '삭도 설계 및 기술지도 협의서'를 체결하였고 1991년 5월에 경박호관리국과 '공중삭도유람항목투자건설협의서'를 체결하였으며 1991년 6월에 정식시공에 들어갔고 1992년 8월에 완공되였다. 이는 흑룡강성에서의 최초로 되는 유람삭도인데 폭포촌사람들은 이렇게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유람삭도는 마을에서부터 경박호조수루폭포하류어귀까지 사이에 가설하였는데 그 길이가 1716미터 (왕복 길이임), 삭도 높이는 평균 8.5미터이고 쌍의자 50개가 순황운행을 하도록 되였다. 촌에서는 유람삭도 가설에 85만원을 투자하였다.

유람삭도가 경영에 들어가면서부터 폭포촌으로 찾아오는 유람객들이 현저히 많아져서 촌민들이 경영하는 려관과 식당은 그야말로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아쉽게도 14년이나 경영해오던 유람삭도가 2005년도에 국가삭도안전관리국의 안전검사에서 삭도안전국가표준에 미달하여 영업을 중지하게 되였다. 이로하여 유람삭도는 폭포촌력사의 무대뒤로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2002년에 촌에서는 '서구'의 옛마을과 마을을 끼고 펼쳐진 협곡을 개발하여 관광지로 활용하였다. 예전에 살아왔던 올망졸망한 초가집들 생산로동에 사용했던 로동공구들, 집살림살이에 사용했던 살림도구들, 이렇게 폭포촌사람들이 원초적인 생활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서구 옛마을 자체가 하나의 조선족민속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을을 끼고 쭉 펼쳐진 협곡이 풍경은 마치도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펼쳐놓은것 같다. 협곡과 민속마을과 한데 어울리는 협곡은 경박호 유람에서 꼭 가볼만한 유람코스로 지목되고 있어서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촌에서는 '서구' 옛마을 관광지를 실력이 있는 룡탑그룹에 임대시켰다.

촌에서는 마을을 홍보하고 더욱 많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기 위하여 '폭포촌고려민속문화축제', '폭포촌 60세이상로인 합동 환갑잔치', '녕안시 조선족 중,소학 구류경기', '동북3성 조선족로인 문구초청경기' 등 큼직한 축제와 행사를 마련하였다.

여러해동안 가난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부유의 길로 나아가면서 폭포촌은 수많은 도전을 하여 오면서 성공의 단맛도 보았고 실패의 쓴맛도 보았다. 촌에서는 유람초대소도 경영하였고 아이스크림공장, 탄화봉( 碳化硼 )공장, 감초제약공장 등 기업들을 경영하였지만 모두 리윤도 창출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특히 촌에서 새로 경영하려는 기업항목에 대한 시장동태와 료해, 분석이 따라가지 못했고 기술과 경영경험이 없었고 치밀한 계획과 엄격한 제도가 따라서지 못했고 사회관계, 인맥관계 그리고 언어상의 렬세로 실패의 고배를 적지 않게 마시였다. 너무나도 값비싼 '학비'를 내고 말았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경박호 관광업이 활성화되면서 폭포촌사람들도 전통적인 농업생산에서 벗어나 상품경제조류속에 뛰여들기 시작하였다. 1983년 봄에 촌민 현대복이 마을에서 사진촬영허가증을 내고 경박호조수루폭포에서 유람객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어 당해에 근 만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는데 이 수입은 고생스레 농사를 지은 수입보다 몇배나 높았다. “돈을 이렇게 버는 세월이구나”하면서 10여명이 촌민들이 사진촬영업에 뛰여들었다. 폭포촌의 녀성들도 일상 용돈이나 벌려고 약간한 돈을 받고 유람객들에게 음식접대를 하던데로부터 민박과 식당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몇년이 안되여 마을이 근 70 % 에 달하는 농호들에서 민박과 식당을 경영해왔고 용암지대에 벽돌집을 큼직하게 지어서 유람객들이 여기서 놀고 먹고 즐길수 있었다. 민박은 구들방으로부터 침대방으로, 식당의 음식은 우리민속의 전통음식과 한족들이 음식소비문화에 맞게 메뉴를 만들어서 고객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은 해외와 연해도시진출로 려관과 식당을 경영하는 농호가 적어졌지만 지금까지 15호의 농호들이 계속하여 려관과 식당의 규모도 더욱 크고 시설도 완벽하게 갖추어서 영업을 계속 하고 있다. 이중 절반이 되는 농호들에서는 2층, 3층으로 된 집을 지어서 영업을 하고 있다.

해외 나들이가 쉬워지면서 일부 촌민들은 한국, 일본, 러시아로 로무송출을 떠났고 적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연해도시로 진출하다보니 그들이 양도한 논을 도급맡아 벼농사규모를 크게 하고있는 벼농사전문호가 7호가 된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기도 하고 산나물을 캐여서 식당에 넘기기도 한다. 논은 마을에서 10여리 떨어져 있다보니 오토바이나 자가용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매년 평균 수입은 7 ~ 10만원에 달한다.

촌민 조중길은 4월부터 농사일을 시작하는데 5월에 모내기를 할 때에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안해가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꼐 농사일을 한다. 가을이 끝나면 안해는 다시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하고 남편은 가공한 쌀을 다 판매하고는 1월에 한국으로 가서 안해와 함께 맛벌이를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열심히 일하여 좋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개혁개방시기를 맞이하여 촌의 경제가 발전하고 촌민들의 삶이 풍요로와 지면서 폭포촌 사람들은 아름답고 깨끗한 새 농촌건설을 다그쳤다.

특히 2009년에 폭포촌은 '흑룡강성 새농촌건설 시점촌'으로 선정되여 새농촌건설지원혜택을 받게 되였다. 2년 남짓한 동안에 성정부에서 투자한 380여만원의 금액으로 소달구지 덜컹거리던 울퉁불퉁한 마을안의 자연상태의 길을 모두 시멘트로 포장하였고 천여그루의 가로수를 심었으며 중심거리에 14개의 태양에너지 가로등을 설치하였고 마을동쪽입구에 한 헥타르에 달하는 문화휴식광장을 새로 건설하였으며 부지면적이 2헥타르 넘어되는 문화체육광장도 건설하였다. 마을동쪽입구에 조선글과 한자로 '폭포촌'이란 글을 새긴 큰 바위돌 비석을 세워놓았고 마을서쪽입구에는 '폭포조선족민속촌'이란 비석을 세워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촌위생소도 새롭게 재수건하였고 70미터의 깊이로 전기우물을 파고 물송급도관을 가설하고 부대시설을 보수했다. 또한 촌에서도 적지않은 자금을 들여 길옆 여러곳에 화단도 만들어 놓았고 가가호호 모두 울타리를 수건하도록 하였고 마을 곳곳에 쓰레기통을 마련하여 놓고는 촌에서 매일 쓰레기들을 경박호관리국 쓰레기처리장으로 실어간다. 하여 마을은 잘 닦아진 길과 알뜰하고 산뜻한 농가가 한데 어우러져서 한폭의 전원시같은 아름다운 새농촌 풍경을 이루고 있다.

2015년말에 폭포촌은 행운스럽게도 흑룡강성 '민족마을개조공정'(民族村寨改造工程) 항목에 선정되여 국가의 지원자금으로 조선민족의 특색이 짙은 마을 중심도로를 새롭게 개조수건하게 되였다.

마을 동서를 가로 질러가는 중심도로는 600미터 남짓이 되는데 자동차도로는 후수콩크리트로 새롭게 포장하였고 중심도로 량켠의 보행도로면은 현무암벽돌을 깔았다. 따라서 60여개의 가로등을 새로 설치하였고 현무암화단을 120개나 만들어 놓았으며 장의자와 정자 100여개나 여러가지 조각상을 새롭게 만들어놓았고 보행도로 바깥쪽에 한옥식 담장을 건설하였는데 담장높이가 1.2미터나 된다. 마을 동쪽입구에 2천평방미터나 되는 주차장을 새로 건설하였고 높이 1.7미터, 길이 100여미터나 되는 인행도를 만들어 놓았다. 마을서쪽입구에는 물레방아와 높이 8미터, 부지면적이 80평방메터나 되는 가산을 만들어 놓았다. 

중심도로의 개조공정은 2017년에 시공에 들어가서 2018년에 전부 완공되였다. 이렇게 볼거리가 많고 조선민족특색이 짙은 높은 수준의 중심도로가 세인들 앞에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수많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렇듯 관광산업의 우월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폭포촌은 2007년에 “목단강시관광업일품촌”으로 , 2011년에는 “목단강시향촌관광시범점”으로 명명되여 조선족민속관광촌으로 부상하였다. 강인하고 근로한 폭포촌사람들은 50여년의 간고한 분투로 무인지였던 석강벌에 살기좋은 마을을 건설하여 왔으며 지금은 살기좋은 도시속의 농촌마을로 소문이 자자하다. 천혜의 폭포촌은 향후 당의 풍성한 정책으로 거침없이 발전해가면서 더욱 놀라운 신화를 엮어갈것이다.

/전동찬, 사진 리수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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