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龙江日报朝文版
国内统一刊号: CN23-0019  邮发代号: 13-26
흑룡강신문 >

‘성화호’장원 삶의 새로운 추형으로

성화촌 력사, 민속문화 관광명촌 건설 탐방

2021-12-12 15:02:13

장원입구

지난2020년도는 성화촌 촌사계보에 지극히 눈부신 한해로 기록되였다. 그해7월3일부터 성화소식이 중앙TV 4개 채널에서 뉴스프로로 련일 보도되면서‘성화돌풍’각광을 받았다. 성급이상 중앙매체에90여편이 뉴스프로로 제작됐다.

코로나 방역제한 환경에서도 성화촌을 찾은 관객이4만명선을 넘었다하니 적은 수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의 떡을 넘보듯 성화의 오늘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제나름대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신기루처럼 뜬‘성화현상’이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중국식 패턴의 잠재한 규칙일거라고 한다.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성화의 변화는 지각변동처럼 그 지평이 넓고 평탄하지 않은 희망 속보이다.

성화촌 촌사박물

예고없이 닥친 페해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여 세상살이 요지경 같더니 향촌마을은 점점 주거불능지로 소외되는 것이 현주소이다. 울고 웃으며 희비의 모험과 행운으로 세계화 도시화의 여파는 결국 우리민족에 코리안드림이란 일희일비의 역정을 만들어 놓아 전통적 고향은 이젠‘이동하는 고향’으로 변했고 어제날 농경문화 공동체 삶은 이미 해체되여 근세 세대들의 흘러간 세월의 이야기로 되였다.

50년대 새 중국에서‘하늘아래 첫 동네’로 소문난 성화농장이건만 예고없이 닥친 그 흔들림만은 피할길이 없었다. 돈벌어 더 잘 살아보려고 한국으로 떠난 사람들 뒤에 남은건 날로 활력을 잃어가는 마을이였다. 90년대에 일찍 페교된 소학교자리는 언녕 그 형체마저 없어져 버렸고 한시대에 향촌 문화광장으로 이름났던 성화촌 구락부도 먼지 투성이 정미소가 되고 주인없는 텅빈집들이 할빈-동강 국도가에 유령가옥으로 방치되여 있어 어수선한 마을 이미지가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어디 성화집체농장 마을이요? 눈뜨고 못보겠소”, “한국바람에 우리는 망했소” 누구탓이라고도 할수 없는 그 불황 앞에서 사람들은 할말을 잃고동강난 한시대의 아픔을 하소연 했다.

2000년대 초에 성화촌 해내외 류동인구는 천명선을 넘어 촌에 상주인구는80여명밖에 안되였다. 이미 로인화된 성화촌에는 희망사항이 더 없어 보였다. “이대로라면 이제 몇년을 더 뻗칠가?”, “이제라도 재흥의 기회가 있을가?”

마을의 앞날을 누구보다 먼저 근심하며 고민한 첫 사람은 촌당지부서기 최철준(57)이였다.

“내손에서 마을이 이 지경으로 되다니?” “지난날 선배님들이 이 땅을 개척하여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면 나한테는 이 터전을 잘지켜 촌민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나가야할 책임이 있지 않는가?”

그의 고민은 더 무거워 질 수 밖에 없었다.

성화촌 촌민 아파트 단지

변화로 이루어진‘성화정신’

성화에서 최서기는 대쪽같이 끈질긴 의력의 소유자이면서 기업가형 경영능력을 갖춘 간부이다. 2010년도 성화촌에서 추진한 새마을건설 프로젝트는 늘 마을의 변화를 생각하고 모색하며 변화를 이끌어 내는 그의 능동성과 관계된다.

2013년도‘성화신촌’으로 명명한 도시화5층 아파트3동이 마무리 되면서112가구가 신축 아파트에 입주했다. 입주률이95%, 촌민주거 조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경사였다. 그 몇년래 성화촌 환경미화 건설도 크게 개선 되였고 사영경제도 활기를 띄여 인구당 평균 년간 소득이2만원 목표를 달성했다.

“촌건설이 이만하면 괜찮겠지. 비슷하다”고 할때 또 다른 기쁜소식이 성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2015년5월 갓부임된 화천현위 곽광복(郭广福) 서기가선택한 첫 조사연구지점이 성화향이였다. 잇달아 현위와 시위에서 열린 수차례 연구 토론회는 모두 성화조선족향을 력사, 민속문화 관광명지로 건설할데관한 주제였는데 그것이 마침내‘성화촌 전반개조 프로젝트’로 결이되고 가동된 것이다.

옥석은 깎아도 옥석이다. “성화는 성화촌으로만 보면 안된다” 는 것이 시,현 당정 주요 지도자들의 일치한 견해였다. 따라서 성화촌은 력사의 보응을 받은듯 더 크게 더 장황하게 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풍년 가을축제 행사에서 촌민들이 한복을 입고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성화호’장원 - 삶의 새로운 추형

‘성화호’ 장원이란 성화촌 촌락 옹근개조 항목 중 관광 유람명소로 건설된 핵심공능 구역을 말한다. 이 구역은 촌민아파트 생활구역과 달리 력사 민속문화관광 유원지로 특화된 다공능 문화산업 구역이다.

2016년에 시공하여2020년에 시험운영을 시작했다. 장원의 총부지면적은15만9천평방미터(전촌 부지면적의64%) 인프라 총투자금7000만원 그중 시와 현정부 투자3000만원이며 기업투자가4000만원이다. 항목규모가 크고 건설 항목이 다양하며 공사 질량이나 품위가 우량하기로 성내 향촌건설 항목 가운데서일류에 속하는 건설 항목이였다.

‘성화호’장원은 성화촌 인문력사, 생태농업, 민속풍정과 체험 레이저관광을 현대판 관광문화에 접목시킨 전형적인 모델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장원내 조형모식이나 공간조합이 합리하고 시공기술 함량도 높다. 유원지내에는 농가락체험원, 별장식민박, 련꽃못, 낚시터, 체육오락 놀이터, 민속체험관, 촌사박물관 등 특정기농 공간이 합리하게 배치 되였는가 하면 구역내 봉사센터에는 두갈래 주차장, 귀빈접대소, 식당, 상점, 노래방, 공연광장 등 부대시설이 구전하여 시너지 효과도 좋았다.

유원지내 가장 큰 기능공간이 조선족 전통 가옥풍경이 다문한33채 별장식 민박구역이다. 체류형 관광지로서 이곳은 가정단위의 도시민들도 찾아와서 자취하며 전원 생활을 체험하며 여유롭게 휴가의 한때를 보낼 수 있다. 유람구내 촌사 박물관은 지난해6월에 대외에 개방했는데 촌개척기 인문력사를 전면으로 료해하는데 충분한 력사자료를 보여 줌으로 사회교육, 후세교육의 한 공간이 된다.

지난해9월 오색단풍이 물든 황금계절에‘화천현 농민풍수절 및 벼문화축제’가 화려한‘성화호’장원에서 열렸다. 성화촌 건촌이래 규모가 가장 큰 대형문화축제 행사였다. 그날 전현각지에서 온 새시대 농장주들이 가슴에 커다란 붉은꽃을 달고6천명 인파로 출렁이는 문화광장에 모였는데 영광찬 그 군상이 더 돋보였다. 광장주변은 각지 특산물을 전시하는 이벤트 행사장이였다. 몇해 전만해도‘눈뜨고 못보겠다’던 초라한 마을이 아니였던가? 누구나 마을변화의 그 진폭이 이렇게 빠를줄은 생각 못했다. 그번 축제행사는 실상‘성화호’농장이 축제문화의 광장으로 업그레이드한 경사였다. 지난날 같으면 온성화향 고향사람들이 민족체육 운동대회에서 열광했던 것처럼 축제문화의 열광팬이 되여 환성이 터졌을 것이다.

그날 성화촌 로인회관에서130명 성화촌로인들이 최제성, 조이권 두로인70생신 축수연이 있었는데 모두 마을의 기상천외한 변모에 심기도 뒤숭숭해서 손에 일도 안잡힌다고 했다. 그중 리용환(79) 로인은“이게 꿈의 천당이 아니고 뭐요? 그래도 성화란 이름이 다르긴 다르오”라고 하며 성화마을 변신에 감개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성화촌 창업의 제2세대로 생산일선에서 모범을 보여주며 일찍 입당했던 길병호, 최제숙 부부는 말했다. 만약“백성의 행복을 생각하는 당의 분투가 없다면 이 나라가 어디에 있고 백성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소? 그래서 우리는 당을 따라오며 살아온 이 평생을 후회하지 않소,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해서 그저미안할뿐이요”

로당원 김동신 로인도“당과 나라의 혜택으로 성화마을이 이렇게 변했고 우리도 이렇게 잘 사는데 당과 나라에 대한 충심만은 저버릴수 없소”라고 하며마음속의 감개무량함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성화촌은‘성화호’장원이 일떠서면서 크게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해 룡강대지의 첫 동네라해도 과언이아닐것 같다. 성화 사람들은 이제 다시 이 마을에서 옛날처럼 제집문앞 눈만 쓸면서 살던 전통적인 취락문화의 낡은 틀거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였다. 그것은 이젠 성화 사람들도 페쇄적이고 유아독존적인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 도시사람 부럽지 않게 삶의 새로운 비전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경종이다. 공유시대에 좁은 인간 굴레에서 벗어나 서로 오고가며 도시와 향촌이 어울리는 열린 형태의 공유마을 건설이 성화에서 더 가능하게 되였다.

장원내 민박 집중구역

새로운 분투

향촌진흥 대승적 차원에서 성화촌의 변천은 이제 갓 시작에 불과하다.

몇년래 성화촌 옹근개조항목 건설을 추진해온 향당위 남남서기는“기회는 준비된 사람을 찾아온다고 이제 우리는 성화의 향촌진흥에 또 새로운 희망사항을 갖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성화촌은 이제 국가3A급 관광명소로 인정 받아야 사회, 경제적 가치를 내다 볼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철준 지부서기는“옷은 이미 다 지어 놓았는데 입을 사람이 없으면 어찝니까?”라고 하며‘성화호’ 장원이 주인없는 집이 될가봐 근심이라고 했다.선행자들의 새로운 고민거리가 틀림없다. 만약 촌의 문화광광 산업이 촌민들의 삶과 동떨어 진다면‘성화호’장원이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촌민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관광명촌의 주인도 딴 사람으로 바뀌울 것이다. 촌민 주인공 의식배양, 명촌건설 전략조정, 귀향창업 프로젝트 가동, 관광정품코스 구축,관광상품 생산 등 산적한 문제들이 빨리 풀려야 새시대 성화촌이 융합발전, 균형발전, 특색발전을 이루고 명불허전 명촌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 핵심키워드는 귀향창업 프로젝트를 빨리 가동하는 것이다. 그 어느때보다 민족의 젊은 피가 수요되는 시점이다.

/박룡수 특약기자

관련 기사
  • 흑룡강성 상지시 어지조선족향 신흥촌은 촌 지도부의 현명한 령도하에 국가의 향촌진흥 정책을 충분히 활용하고 본 촌의 실정에 맞는 여러 가지 제도와 촌 규약을 제정하고 착실히 실시하여 목적 있고 계획적으로 향촌진흥을 꾸준히 추진한데서 흑룡강성 향촌진흥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 상지시에서 동남쪽으로 90킬로미터 상거한 신흥촌은 314가구에 인구가 874명(그중 조선족인구가 94% 차지)이며 경작지 면적은 6273무, 습지 보호 면적은 700무이다. 신흥촌은 교통이 편리하고 환경이 아름다우며 량호한 지역우세와 경제발전 잠재력이 크다. 1984년도부터 시작하여 37년간 신흥촌을 이끌어 온 김동호 당지부서기를 핵심으로 한 촌 지도부는 정부의 새 농촌 건설 관련 정책을 본촌 실제와 유기적으로 결부시켜 아름다운 향촌 건설, 촌민들의 물질 문화 생활 질 향상을 골자로 실사구시적인 사업작풍을 견지하여 옳바른 리상 신념을 수립하고 본 촌의 우세와 잠재력을 충분히 발굴 활용하여 정신문명, 생태환경, 경제발전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 지난 2020년도는 성화촌 촌사계보에 지극히 눈부신 한해로 기록되였다. 그해 7월 3일부터 성화소식이 중앙TV 4개 채널에서 뉴스프로로 련일 보도되면서 ‘성화돌풍’각광을 받았다. 성급이상 중앙매체에 90여편이 뉴스프로로 제작됐다. 코로나 방역제한 환경에서도 성화촌을 찾은 관객이 4만명선을 넘었다하니 적은 수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의 떡을 넘보듯 성화의 오늘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제나름대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신기루처럼 뜬 ‘성화현상’이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중국식 패턴의 잠재한 규칙일거라고 한다.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성화의 변화는 지각변동처럼 그 지평이 넓고 평탄하지 않은 희망 속보이다.
  •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은 국가향촌진흥정책의 동풍을 빌어 최근년간 유구한 력사문화와 다채로운 조선족 민속문화를 결합시켜 ‘중국 조선족 생태문화 제1촌’건설을 목표로 농촌 생태거주체계, 농촌 생태환경체계, 농촌 생태경제체계와 농촌 생태문화체계 건설에 착안하여 조선족 문화, 자연풍경과 인문력사를 일체화한 조선민속관광촌으로 건설하고 있다. 2020년 흑룡강성 조선족촌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아름다운 레저향촌’으로 선정되였으며 선후로 ‘전국향촌관광중점촌’, ‘전국향촌관리시범촌’으로 선정되여 향촌진흥의 길에서 아름다운 설계도를 펼쳐가고 있다. 하다면 금성촌은 어떻게 이런 성과를 거두었을까? 지난 10년간 탕왕조선족향의 향장을 력임했으며 현재 탕원현 민족종교국 국장을 담임하고 있는 정성일국장은 금성촌의 성과를 천시(天时), 지리(地利), 인화(人和), 즉 국가의 향촌진흥정책에 따른 자금지원, 자연적으로 우월한 생태환경과 지리적조건, 우경철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을 주도로 하는 단결된 금성촌 지도부의 역할에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版权所有黑龙江日报报业集团 黑ICP备11001326-2号,未经允许不得镜像、复制、下载
黑龙江日报报业集团地址:黑龙江省哈尔滨市道里区地段街1号
许可证编号:23120170002   黑网公安备 23010202010023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