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선조들은 고유한 문화의 혈맥을 이어가며 중국의 대가정이라는 특수하고도 우월한 환경 속에서 자기만의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또 어떤 설움과 한이 묻어나는 우리 무용의 맥락을 구축해왔다. 북경무용학원 안무학부를 수석으로 입학하기까지 한초혜(1987년생)의 동년과 청춘의 모든 기억은 오로지 무용이였다. 현재 북경초혜무용공간 대표이기도 한 그는 여전히 온 몸짓, 옹근 열정으로 후대양성을 위해 꿈의 춤사위를 펼치고 있으며 우리 무용 전파에 혼신을 쏟고 있다.
한초혜.
동년의 동경, 꿈을 찾다
그는 무용가정에서 태여났다. 전국에서 한가족 세식구 모두가 민족무용사업에 종사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고 박용원 선생의 제자이자 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수인 아버지 한룡길과 무용수인 어머니 추실은 어려서부터 그가 무용예술과 접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다 4살 적이였던 어느날 저녁 어머니가 공연을 나가다보니 그를 맡겨둘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수업을 하는 무용훈련장으로 데려간 적 있다는데 그때 춤추는 무용수오빠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집에 가서는 그 동작들을 거침없이 따라했다고 한다. 우월한 무용유전자를 타고 났는데도 부모님은 무용의 길을 고집하는 어린 딸을 반대하기에 바빴다. 부모님은 그가 법관이나 변호사로 될 것을 희망했다. 무용만 제외한 글짓기, 피아노, 노래, 설계 등 각종 과외써클은 빠듯했던 살림에도 불구하고 두말없이 밀어줬던 걸 보면은 딸의 여러 방면의 장끼를 발견하고 키워주려던 마음이 컸던 것이다.
석사시절 안무했던 작품 <향·락> 한장면.
그러다 2000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평양류학을 떠났다는 아버지, 그 틈을 타 한초혜는 무용꿈을 위하여 유력한 훈원군인 외할머니한테 청을 들어 온 가족이 아버지 설복에 나서도록 했다. 당시 그는 소학교 과문랑독테이프를 록음기에 넣고 자신의 지향을 음성으로 담아 평양에 보냈다. 꿈을 그리던 간절함은 한달이나 걸려서야 아버지에게 도착되였다.
“아버지, 제발 나를 무용을 하도록 해주세요. 난 무조건 해야 해요…”
드디어 한초혜는 연변예술학교시험을 보는 날을 맞이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춤출 줄을 몰랐던 그는 사진에서 본 것을 따라 두꺼운 박스종이를 동그랗게 잘라 평고북이랍시고 시험장에 들고가서 맘대로 팔다리를 움직이고 나왔다고 한다. 허리 유연성을 체크하는 시험코너에서 다른 친구들은 다 자기절로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사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동작이였기에 손을 들고 선생님을 불러 “선생님 저의 허리 받쳐주세요. 그러면 나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걸 보면은 꿈에 대한 열정과 그 순발력이 얼마나 가상한지를 알 수 있겠다. 그외 천성적으로 발목이 얇았기에 높이뛰기 과목에서는 그가 월등했다… 이렇게 한초혜는 자신의 무용인생에 힘껏 첫발을 내디뎠다.
북경무용학원 진학시기 창작한 작품 <파란 하늘>을 추고 있는 한초혜.
평양에서 류학 중인 아버지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딸의 막을 수 없는 길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북경으로 오는 아버지와 상봉하던 날, 부모님은 그를 무용 최고학부인 북경무용학원으로 데리고 갔다. 13살 되던 그해, 학교에 들어서던 봄날의 싱그러운 그 기운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고 한초혜는 말한다.
“네가 앞으로 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지향과 신심이 있으면 돌아가서 무용공부를 하고 아니면 원점으로 돌아가 학업에만 열중해라.”
아버지는 진정 행동으로 딸의 무용인생을 응원해보기로 했고 한초혜 마음에도 꿈을 위한 짙은 뼈가 자랐으리라. 북경에서 돌아와 연변예술학교 고등부에서 무용공부를 하고 있는 나날들에 그는 그 어떤 피로와 아픔은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머리 속에는 학교에 들어서던 그 봄날의 바람향기까지도 잊을 수 없었기에. 그것은 동경이였고 희망이였다.
북경무용학원 수석 입학생
4년간의 기대와 지루한 노력 끝에 드디여 북경무용학원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2004년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찾았다. 생소한 안무전공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학기는 안무학부에 진수하면서 기초기능을 키워야 했는데 당시 아버지는 넉넉치 못한 형편으로 하여 그를 10여명이 함께 주숙하는 너무나도 루추한 지하 하숙방에 안치시키고는 떠났다. 어려운 환경에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시험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너무나도 고마운 분들을 만났다. 북경민족대학 무용학원의 고홍녀 교수와 최월매 교수의 소개로 북경무용학원 안무학부의 정환성 교수를 만나게 되였는데 정교수의 밑에서 안무시험의 여러가지 내용들을 탄탄히 익히며 시험준비를 하게 되였단다. 연습장소가 따로 없어 헬스장 한구석을 빌려 수업을 하는데 3시간 비용이 850원, 이는 사실 그의 가정 경제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고 한초혜는 회억했다.
이때 여의치 못한 상황을 꿰뚫어본 정교수가 고마운 제안을 해줬는데 바로 자택아래 주차장에서 수업을 해보자는거였다. 그날부터 한초혜는 매일 장갑을 끼고 목수건을 동여매고 얼음장같은 주차장의 콩크리트바닥을 누비며 8시간씩 맹연습에 들어갔으며 아버지는 옆에서 더운 물주머니를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해줬다고 한다.
그때 북경무용학원 안무학부시험은 총 아홉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였다. 한차례 락방의 고배를 맛본 적 있던 그로서는 차마 시험결과를 기달릴 용기가 없어 방에서 기다리고 아버지한테 결과확인을 부탁했단다. 새벽 한시가 거의 될 때쯤 뚜벅뚜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났다. 붉게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는 격동된 눈빛으로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수석이다, 전국 일등!”
가족사진.
환희에 찬 목소리와 아버지 뜨거웠던 품 속, 그 심장박동을 한초혜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국에서 8명만 뽑는 시험에 일등으로 붙다니, 6년간의 간난신고 끝에 이루어낸 첫 성공. 이는 한초혜 한사람의 노력이 아닌, 이 한 무용가족이 로심초사 함께 이뤄낸 눈물겨운 결과였다. 한초혜는 오매에도 그리던 북경무용학원 안무학부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가 안무학부를 선택했던 리유는 간단했다. 우리 민족춤을 멋들어지게 만들어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계기는 더욱 간단했다. 연변예술학교입학초기 늦은 밤 잠을 청하며 우연하게 첼로독주곡을 감상하다가 무아지경 속에서 펑펑 울며 깨여났는데 그때 인생 처음으로 되는 '녀수인'(女囚)이라는 독무작품을 창작해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한초혜 역시 매번 무대에서 눈물을 머금고 표연하였단다. 무용형상의 직관적인 감수성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면서 말이다. 한초혜의 천부적감수성은 지금도 그의 작품과 안무과정에 력력히 체현되고 있으며 그 또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초혜무용공간 제2회 정기공연무대에서.
'제자컵'(桃李杯) 무용콩클은 전국적인 젊은 무용엘리트들이 겨루는 최상의 무대였고 그 무대에 진출한다는 것은 한초혜의 오래된 꿈이였다. 더군다나 북경무용학원을 대표해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에서 선발된 무용인재들 최고의 무용전당, 콩클은 3년을 주기로 열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푼두푼 모아뒀던 원고료까지 합친 2만원을 손에 꼭 쥐워주면서 집의 총재산이니 한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했다.
한초혜는 그 길로 작곡가 선생님을 찾아가서는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못하면 죽습니다.”라고까지 말씀드리며 또 한번 이 간절한 꿈을 이뤄보고자 결심했다. 결국 많은 경쟁자들을 뒤로 하고 그 이듬해 8월 학생신분임에도 안무가의 이름으로 개인무용수를 데리고 북경무용학원을 대표해 전국무용콩클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처녀작 '홀로 타향에서'(独在他乡)로 말이다.
그 뒤로 거의 10년 동안 한초혜는 국내외의 수많은 무용콩클에서 북경무용학원 안무가의 명분으로 여러 작품을 선보이게 되였고 많은 명예들도 받아안게 되였다. 그때 북경무용학원 민족민간무용학부 주임인 고도 교수의 눈에 들어 석사제자로 공부할 소중한 기회도 주어졌다.
아이들이 무용꿈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의 꿈
“나는 항상 행운아였다. 그간 많은 선생님들 사랑을 받았고 많은 최고 무용수들이 나의 춤과 함께 해주었다. 그 모든 과정이 오늘도 동력으로 되고 있다.”
2018년 1월 한초혜는 북경에서 '초혜무용공간'을 설립했다. 현재 200여명의 학원들과 2명의 무용지도를 보유한 무용공간은 수십차례 크고작은 공연대회에 참가하며 학원들의 무용수준을 련마시켰다.
무용꿈나무들과 함께.
한초혜는 자신의 파트너와 무용수들한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는데 바로 희망과 가능성을 보아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무용창작의 리념과 '초혜무용공간'의 좌우명으로 삼으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아무리 힘듬에도 아이들 수업만큼은 꼭 견지하는 것의 리유가 여기에 있단다. 그는 그동안의 학습과 무용생활에서 늘 마음 속에 꿈틀거렸던 민족심을 다지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냈다.
그간 한초혜는 많은 조선족아이들을 만났으며 향후 차세대 조선족무용수를 배양해내는 것을 최고목표로 삼고 있다. 한초혜는 그 아이들과 수시로 춤을 추고 함께 놀이도 하며 꿈의 이야기를 나눈다고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참 고맙게도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바로 선생님이 전공무용수들과 작업하는걸 보는 순간이란다. 아이들은 수업 한 두시간 전에 벌써 와서는 문을 똑똑 두드린다는데, 이렇게 일찍 와서 조용히 구석에 앉아 선생님들의 춤추는 모습을 숨 죽이고 본단다. 오로지 무용꿈 하나를 위하여 달려온 이가 이렇게 또 다시 누군가의 소중한 꿈으로, 닮고 싶은 롤모델로 돼가고 있다.
초혜무용공간 제1기 조선족무용과 창작세미나에서 제자들과.
“전승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는 일에 혼신을 쏟으면 누군가는 그런 모습에 꿈을 키울 것이다. 많은 선생님께서 진심어린 지도와 사랑으로 나를 키워주셨던 것처럼 나도 우리 아이들한테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딸과 사랑스러운 아내와 멋있는 엄마로써,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춤에 담아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안무가가 되고자 한다…” 이렇게 우리 것을 보급하고 전파하는 청춘들은 아마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이제 한초혜는 아이들이 저들의 무용꿈을 이루는 것이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고 말한다. 오래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류설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