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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촌바우 -박철산

2021-12-12 15:07:16

稿件详情 사전에 따르면'촌바우'란 도시에 비해 문화수준이 뒤떨어진 농촌에 사는 사람 또는 활발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향진에서 근무하다가 금방 현성기관에 소환되였을 때 친구들은 장난삼아 나를 촌바우라고 불렀다. 그런 칭호를 들어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긴 내 인생경력에서 거의40년은 농촌과 향진에서 생활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의 선조들은 세세대대로 농경시대에서 살아 온 철두철미 촌바우였고 나는 에누리 없는 그 후예였다.

도농차별이 심하고 심분을 각별히 밝히던 그 시대에 살던 농촌사람들은 누구나 고된 농촌생활을 싫어했다.

젊었을 때 나의 꿈은 하루빨리 촌바우라는 멍에에서 벗어나 풀뿌리를 대나무뿌리로 바꾸는 것이였다. 

내 후대마저 촌바우로 키울 수 없다는 오기가 한가슴 그득했다.

허나 그 아름다운 욕망을 실현하는것은 자아를 전승하는 처절한 싸움이였고 뼈를 깎아내는 기나긴 인생수업이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마을에 돌아와 얼마 안되여 나는 운이 좋게 대대청년사업을 맡았다. 비록 가방끈이 짧아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맡은 청년사업을 잘 해 내 운명을 개변시켜보고 싶었다.

청년사업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도 청년활동경비가 풍족해야 했다. 활동을 할 때마다 대대(촌)에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청년들을 휘동해 교통이 불편하여 마을에서 경작하지 않는 묵밭을 개간하여 콩을 심어 가꾸고 부업도 조직했다.

여름철이면 기차역에 가서 황연석탄을 메여 나르는 부업을 했다. 플랫폼에 부리운 석탄을 다시300미터 되는 곳에 날라다가 쌓아 놓는 일인데 석탄한톤에1원이였다.6명이서 역전수구조 직일실에서 거처하면서 자취살이 했는데 반찬이라야 파와 마늘에 고추장 감자와 썩두부가 전부였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랭수에 쌀밥을 말아서 썩두부를 찍어먹으니 고소하고 짭짤해 밥이 엄청 당겼다. 일축을 내기 위해 둘이 한조가 되여 큼직한 광아주리에 한번에50여근씩 되는 석탄을 멜대로 메고 반바지와 러닝바람에 뛰여 다녔다. 온몸은 석탄먼지와 땀이 한데 달라붙어 마치 가마땜쟁이를 방불케 했지만 누구하나 힘들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도 가로등 불빛을 빌어가며 일하였는데 하루에 평균80여톤씩 메 날랐다.

그렇게 번 돈에다가 가을에 청년전에서 얻은 수입을 보태 공사에서 제일 먼저 청년문화실을 꾸렸다. 그리고 도서와 손풍금, 색스폰, 나팔, 장단 등 악기들을 갖추고 문예선전대를 꾸려 사원들에게 문예종목도 공연했다. 이른 아침이면 민병훈련을 조직하고 마을의 환경 청소도 하고 흙판보도 꾸렸다. 청년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여 여러번 공사와 현 해당 부문의 표창과 인정을 받았다.

28살 나던 해에 공사의 말단 공무원으로 발탁되여 촌바우라는 멍에를 벗었다.

그런데 다년간 농촌에서 뻐를 궂혀오면서 몸에 배인 습관만은 좀처럼 바꿀 수 없어 곤혹을 치렀다.

내가 사업하던 향진에는 중앙의 수장들과 외국손님들이 자주 찾아왔다.

한번은 중앙 수장동지가 사업 시찰을 오게 되였는데 나는 그냥 평소와 같은 옷매무시로 출근했다. 지정된 시간이 되자 시위와 시정부의 령도동지들이 먼저 도착했다. 나의 옷차림새를 본 시위 판공실의 한주임은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양복을 갈아 입고 넥타이를 매라고 했다.

집에 가서 양복을 입고 거울에 마주서서 넥타이를 맸지만 좀처럼 제대로 맬 수가 없었다. 안해가 넥타이를 갖추어 놓은지 오래나 여태껏 한번도 매보지 못했다.

넥타이를 매면 목이 졸리고 가슴이 막 갑갑해나면서 아주 불편했다. 그런 연고로 외지로 출장가나 결혼식에 갈때면 안해가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라고 바가지를 긁었지만 귀등으로 흘러 버리군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매보지 않던 넥타이를 갑자기 매려니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급한 김에 안해가 배워준 기억을 더듬으며 대충 매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섰다.

나의 차림새를 본 한주임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내가 맨 넥타이를 다시 깔끔하게 매 주었다.

어릴 적에 소선대에 가입 할 때 넥타이를 매본 후로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매보는 넥타이였다.

그야말로 촌바우를 표현하는 생동한 무대였다.

그후부터는 손님접대를 감안하여 아예 쪼르레기가 달린 넥타이를 갖추었다.

그런데 농민들과 촌간부들은 촌바우같은 사람을 더 좋아했다. 혹시 하향가서도 촌간부들과 한데 어울려 김치쪼각이나 두부 한모 놓고 근들이 배갈을 허물없이 나누면서 속심을 나누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가군 했다. 그들은 틀이 없고 소박하고 실제적으로 일하는 촌바우같은 향간부들을 더 존중했다.

현성 기관단위에 소환되여 사업하면서도 몇년간은 나의 촌바우같은 사업작풍이 불쑥불쑥 튀여 나오군 하였다.이를테면 회의를 열어도 지루하게 열지 않고 간단간단 요점만 강조하고 불필요한 형식은 버리고 빈말은 적게 하고 실제 일을 많이 하고 맡은 사업을 착실히 하는 사업 작풍을 강조했다. 하여 다른 부문의 동사자들로부터 촌바우라는 소리를 푸술히 들었다.

촌바우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사실 나에게는 여러가지 취미가 많았다. 남자라면 다면수가 되여야 한다는 것이 젊었을 때 내 인생의 신조였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가별히 좋아하고 청년시절부터는 글쓰기도 하고 구기운동을 포함하여 낚시와 스케이트, 롤러스케이트 등 운동을 즐겨했다. 물론 프로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항목에서나 남보다 별로 뒤지지 않았다. 공사에서 문예경연대회를 할 때 만담을 하고 독창을 부르기도 했다.

조금은 인기가 있었기에 내 주위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많이 몰려들고 호소력도 있었으며 청년사업도 잘 해 나갈 수 있였다.

나는 지금도 촌바우로 불리우고 싶다.소박하고 성실하고 다정다감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그런 촌바우로 말이다.

이젠 편안한 백성이 되였으니 건강을 챙기는 것을 주식으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반찬으로 삼아가면서 한끼를 먹어도 맛있게 먹고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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