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龙江日报朝文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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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 > 문학

수필 | 나부지몽 - 김영분

2021-12-12 15:07:32

4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호적은 한 사람의 좌표로 통했다. 호적부 하나면 이 사람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물론 하고 있는 일까지도 알 수가 있었다. 농촌호적이면 땀 흘리며 흙을 뚜지는 농사군이고 시내 호적이면 깨끗한 옷차림에 책상머리에 앉아서 놀고 먹는 쌍발쟁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직업도 단순했고 할 수 있는 일도 단조로웠다.

그 시절 쌍발쟁이는 더없이 빛나는 광환이였다. 개혁개방 전 날씨 눈치를 살피며 농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매달 봉급을 현금으로 받는 시내 사람은 샘이 나도록 부러운 존재였다. 탈곡이 끝나고 공량을 다 바친 후 조금 남은 여유의 쌀로 두부도 바꿔 먹고 애들 옷견지도 마련해야 하는 농민들에게 현금을 쥐여 보기란 하늘에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을 출세시켜 시내사람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각오가 철석같았다. 그 시기에  자식을 대학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군대라도 보내서 신분세탁을 시키려고 애썼고 처녀들은 조금 못났더라도 공량을 먹는 시내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시내에서 살게 되기만 하면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생활이 펼쳐질 것 같았다.

도시인이 된다는 것은 비가 새는 초가집이 아닌 차곡차곡 정연하게 개여져 있는 아파트에서 살 수 있고 흙투성이가 아닌 깨끗한 시멘트 길에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달과 별을 지고 다니며 허리 구부려 땅과 씨름하던 고달픈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세상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개혁개방의 물살이 빠르게 퍼지며 시내로 진출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마른 목을 추겨주었다.

90년대가 되자 전란을 피해 만주벌판으로 이주하여 투박한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이삭을 춤추게 했던 농민들의 발걸음은 연해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족 농민들은 한국기업이 중국 연해도시로 대거 진출하는 보폭에 맞춰 홍수처럼 도시로 몰려왔다. 

소망하던 도시생활이였지만 꿈처럼 버젓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농촌에서 뒹굴면서 투박스레 커온 덕에 매집이 좋아서 그나마 닥쳐오는 천만가지 시련을 용케도 이겨냈다. 민들레 씨앗처럼 뿌려지는 곳을 탓하지도 않고 아무리 으슥진 곳이라도 해빛이 조금이라도 비추면 파란 잎을 피우고 거센 비바람이 불어치면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우리는 물과 같이 세계 각 곳으로 스며들었다. 연해도시는 물론 해외 진출도 서슴없었다.

청도는 이미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가 되였다. 곳곳에 우리말소리가 들려오고 한국인이 청도에 오면 중국가이드가 필요없이 한국말이 통할 정도이다.

보잘것없던 농민이 대형 공장을 경영하는 대표나 음식체인점 사장이 된 경우도 있다. 매년 운동회가 열릴만큼 사회활동도 활발하다. 자체로 예술단을 묶어 자선공연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이면20여년 사이에 농촌 사람으로부터 시내 사람으로 화려한 변신을 이룬 셈이다.

번데기는 자기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방으로 다시 태여난다. 그만큼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많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중국 수나라 때 조사웅이 나부산(罗浮山)에 이르니 소복담장(素服淡妆)한 미인이 반갑게 영접을 하였다. 아릿다운 미인의 향기에 취해 술을 마시고 마음껏 즐겼는데 이튿날 깨여나보니 활짝 핀 매화나무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우리가 꿈꿔왔던 세련된 도시생활은 그야말로 나부지몽과 같았다.

요즘 청도는 현지에 집을 산 사람이면 호적을 떼여올 수 있다는 새로운 정책을 펴냈다. 그러자 파출소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20여년전 농촌에서 올라와 도시인으로 남으려고 아득바득 발버둥 치던 사람들은 이젠 서류상으로 명실공히 도시인이 되였다.

수십년의 인생길에서 어린 시절은 가장 비옥한 농촌 땅에서 튼실하게 자랐고 울바자가 듬성듬성 세워져있는 산간마을을 탈출하는 꿈을 수없이 꾸어왔다. 제일 불타는 청춘은 타향에서 도시인 행세를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호적에 적혀있는 툰이라는 동네 이름이 창피하게 느껴져 하루 빨리 번듯한 시가지 주소가 적혀있는 시내호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절벽에 가냘프게 붙어서 능금을 따는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은 덕분에 나도 툰이 아닌 도로 번지수가 적힌 호적을 거머쥐였다.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담담할 뿐이다. 도시인은 도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우직한 중년이 된 지금은 향수에 젖어있다. 고향의 눈 내리는 사진 한장에 목메이고 가로수 심어져 있는 동네길이 그립다. 어릴 때 뛰여놀던 학교 마당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찰랑이는 도랑에 헤염치는 버들개치가 사무치게 보고싶다. 툰이 적혀져 있던 곳의 추억을 파먹으며 도시에서 살아갈 새로운 힘을 얻군 한다.

늦가을의 황소처럼 게으른 볕쪼임을 하던 농촌의 리듬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호적은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만큼 중요한 좌표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꽃이 피고 희망을 품으려는 의지와 실천하는 노력만이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라는 것을 알았다.

세월의 변화를 온 몸으로 맞으며 내가 딛고 있는 길에 내 삶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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